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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만큼 거둔다는 말, 참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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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북시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512회 작성일 24-01-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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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만큼 거둔다는 말, 참 좋지요?


공무원   박*진


넘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넘어진 자의 아픔을 모른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기분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시력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장애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던 중 처음으로 내 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명을 들려주었다. 시신경이 차츰차츰 파괴되어 마침내 시력을 잃고 마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믿기 힘들었다.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유전적인 질환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촌에 팔촌까지 다 뒤져보고 할아버지 세대까지 둘러봐도 나 같은 증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전질환이라면, 집안에 누군가 한 명쯤은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다른 병원에 가고 또 가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어렸을 때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데, 그때 눈이 죽어버린 상태로 깨어 눈이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것이 망막색소변성증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한참 즐기면서 뛰어다녀야 할 내 대학생활은 엉망이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막막하기만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형체도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대학은 어찌어찌 졸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후가 답답했다.


국어계열을 전공했지만, 책은커녕 종이 조각 한 장 읽을 수 없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시각장애인특수학교란 곳을 알게 된 게 바로 그때쯤이었다. 이곳에 입학하게 되면, 안마를 가르쳐준다고 했다. 자격증도 주어 돈도 벌 수 있다니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시각장애인특수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시각장애인특수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안마사 생활을 했다. 생각보다 수입이 괜찮았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책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국어교사가 되겠다는 꿈도 머나먼 별나라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한때 우수한 교사로 많은 학생들의 우상이 되겠다던 맹세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이슬같은 결심이었다. 돈은 그만큼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통제할 수 없는 야생마가 되어 내 삶을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다.


사치도 제법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다니던 안마업소에서 원장과 다투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 생활은 계속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고서야 나는 내가 그 동안 책에서만 읽던 방탕한 생활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마업을 시작한 지 꼭 5년째가 되어서야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점자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매일같이 점자를 읽어댔지만, 한 번 잃어버린 감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점자읽기를 포기하고, 컴퓨터를 통해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때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을 알게 되었다. 여러 복지관에서 학습지원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옛날 도서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을 이용하는 지인으로부터 이곳에 가면 최신 자료가 많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천운이었다. 이미 제작된 도서도 쉽게 받아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자료도 한 두 달 내에 받아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교사로서의 꿈을 키워보기로 했다.


온라인강의를 들으면서 1년 이상 공부에 매진했다. 한 번에 합격해보일 생각으로 교육학에서부터 전공서적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특수교사와는 달리 국어교사는 자리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올해까지 6년째 장애인국어교사를 일절 뽑지 않을 정도였다. 타지로 나가볼까도 생각했지만, 1년만 더 기다려보자, 1년만 더 기다려 보자라고 되뇌인 것만 5년이 지나버렸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특수교육을 다시 전공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공부한 게 너무나도 아까웠다.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기존에 해왔던 모든 것을 덮어야 했는데, 또 덮을 것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차라리 좀 더 일찍 준비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존에 땄던 한국사능력시험 자격도 기간만료를 코앞에 두게 되었다.


한국사능력시험을 다시 준비하면서 괜히 눈물이 났다. 준비하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 억울했다. 가족들에게 손 벌리는 것도 민망했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다시 안마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돈은 적게 벌더라도 헬스키퍼를 하게 되면, 약간이나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날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사실상 처음부터 하는 공부가 아닌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꾸준히 정리만 하면 됐기에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아침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꼭 합격하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와서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책만 봤다. 하루에 대략 11시간을 그렇게 공부에만 매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또다시 장애인국어교사 자리가 나지 않자 서울에서 시험을 보게 됐다. 일을 끝내자마자 서울로 올라가서 내일 있을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울행은 처음부터 뭔가 배배 꼬인 실같은 느낌을 주었다. 5시간 가까이 장애인콜택시도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역곡절 끝에 탄 택시도 이상한 곳에 내려주는 바람에 한참을 헤맸다.


겨우겨우 예약한 모텔을 찾아 하루의 피로를 푼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날 늦잠을 자버렸다. 택시를 불러 부랴부랴 수험장을 찾았으나 허둥지둥한 탓에 교육학을 어떻게 봤는지도 모를 정도로 첫 번째 시간이 지나버렸다. 전공과목은 차분히 풀었으나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성적이 공개되고, 제발! 이라는 내 바람과 달리 불합격통지가 내게 내려졌다. 1점 차이였다. 교육학이 1점 차이로 과락이었다. 전공만 월등히 높은 점수라 합격한 사람보다 평균점수만 놓고 보면 내가 훨씬 앞섰으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과락으로 인해 난 불합격인 것을...


한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내 친구가 공무원시험을 한 번 봐보라고 권하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서울시에 합격해서 10여 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공무원 친구는 그 동안 내가 공부한 게 아깝다면서 공무원시험을 우선 쳐보라는 것이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임용을 따로 준비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에 또다시 귀가 솔깃해졌다. 그렇게 해서 교사가 된 공무원도 있다니 나도 뭔가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시험은 다섯 과목을 봐야 했다. 국어, 영어,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행정법, 행정학, 수학, 과학, 사회 중 두 과목을 선택해서 치르면 됐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싶어 기출문제를 놓고 풀어보니, 국어는 대략 90점 정도 나오고, 한국사는 80점 정도 나왔다.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점수였다. 반면, 영어는 0점, 행정법과 행정학은 30점정도 나왔다.


본래 영어를 잘 못한 것도 있지만, 0점은 정말 내게 있어서 충격적인 점수였다.


이런 점수로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임용을 계속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을 고심했는지 모른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는 공무원시험에 관한 자료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어차피 임용과 같은 날에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라 공무원시험을 먼저 봐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시험을 볼 때의 컨디션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는 영어였다.


이걸 어떻게 끌어올리는가에 따라 내 합격 컷이 결정될 터였다. 단 한 문제도 못 맞출 실력으로 어떻게 시험을 볼까 여기저기 상담도 받아봤다. 결과는 노력 뿐이었다.


처음에는 영단어만 외웠다. 하루에 30개씩 외우면서 일주일마다 5개씩 늘려갔다. 아는 단어를 적절히 패스하면서 외다 보니 두달 쯤 되어서부터는 3000여 개의 단어를 욀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영어실력이 탄력적으로 늘었다. 다소 부족한 문법은 유투브자료를 뒤져보니 여러 강의자료가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맨투맨 강의를 하는 어느 선생님의 강의가 내게 딱 맞았다.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답게 기초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이 꼭 맘에 들었다. 가끔 노래로 암기하는 법을 가르쳐줄 때에는 오~ 하면서 하루 종일 그 노래만 흥얼거렸다. 그러면서 하루에 20문제씩 꼬박꼬박 풀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하루 중 8시간을 영어에만 온전히 투자한 셈이었다.


행정법은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에게 인권강의를 하던 중 알게 된 한 학생의 학부모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대학 강단에서 행정법을 가르쳤던 교수님이셨는데, 기초적인 것을 잡아주시겠다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재능기부를 해주셨다. 행복했다. 늘 어렵기만 했던 부분들이 하나씩 해결되는 것 같아 자신감도 붙었다.


아침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는 패턴은 계속 되었다. 영단어는 하루만 보지 않아도 금새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스프링식으로 매일매일 되새기며 외웠다. 5000개의 단어를 외웠을 때부터는 더 이상 추가로 외지 않고, 이것만 반복해서 봤다. 이것만 해도 하루 4시간은 족히 들었다.


10여 분을 쉬고 다시 영어 문제를 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문제를 풀었고, 초등학교 문제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중학교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공무원시험과는 다소 다른 패턴이라고들 하지만, 걸음마도 떼지 않은 상황에서 뛰는 것부터 할 수는 없었다.


단문에 익숙해진 다음에 복문을 연습하니 영어문제가 한결 쉽게 다가왔다. 0점이던 영어점수는 6개월쯤 접어들었을 때 어느 덧 50점 이상을 맞을 수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였다.


국어와 국사는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매일 관련 유투브영상이나 팝캐스트를 찾아 들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컨텐츠들이 비치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알 수 있는 계기도 되었을 뿐 아니라, 돌발적인 문제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풀 수 있는 넉넉함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경우였다.


행정법과 행정학은 생각보다 점수가 잘 오르지 않는 과목이었다. 비슷한 용어들이 많이 나오다보니 헷갈리는 요소가 많았다.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시험을 보기 전에 얼추 60점까지 끌어올리긴 했으나,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평균 70점 정도 나오는 점수로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듣기로는 80점은 나와야 공무원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기에 일반행정직렬에서 사회복지직렬로 바꾸어 시험을 보게 됐다. 1차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기 전날, 시청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필기시험을 합격한다는 통보였다. 뛸 듯이 기뻤다. 채점을 해본 결과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였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발표가 나기 전까지 얼마나 맘 졸이며 기다렸는지 모른다.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면접을 보기 전까지 가족들과 주변 친구들이 매일 가상 면접관이 되어 면접을 치렀다. 3주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그리고 다시 2주 후,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금은 구청에서 구보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몰라 발령을 받기 전까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인사과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또 검토한 뒤에 시각장애인들이 음성보조출력기를 통해 컴퓨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참작, 메모장으로 업무를 볼 수 있는 부서로 배치해 주었다.


처음에는 구보제작에 관한 글 몇 편 요약해주는 업무만 했지만, 지금은 사이트 하나를 관리하는 일도 하고 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얼마나 열정적인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도 그 비중을 달리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내가 최단 기간에 공무원시험을 합격했다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최단 기간에 합격한 게 아니다. 국어만 놓고 보더라도 수 년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국사 또한 별도로 공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직 영어에만 모든 것을 투자했다.


만약 내가 다른 과목들도 백지상태였다면, 내 시험기간은 그만큼 배로 늘어나지 않았을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조금씩 조금씩 쌓아왔던 지식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자태를 뽐낸 것 같다.


그게 다른 영역이었다 할지라도 수 년간 겪었던 고통이나 슬픔, 회한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 기쁨은 느낄 수 없었으리라.


시각장애인이 되고나서 참 많은 시간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장애인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걸어왔던 길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나침반 같은 길로 남았으면 좋겠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고민하고 있다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당장에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뿌린대로 거둔다고 어디에서 내 수고를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뜻하지 않는 소식에 더 기뻐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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